감귤의 역사



1. 귤의 고장 ‘제주’

제주는 감귤 나무가 선사시대부터 자랄 수 있는 자연환경적 여건을 갖추고 있었습니다.

제주도에서 감귤을 재배하기 시작한 시기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삼국시대부터라고 추정합니다.

제주의 귤을 과일로 먹기 시작한 때는 고려시대입니다.

또한 고려시대는 제주의 귤을 정기적으로 중앙정부에 진상품으로 바치기 시작한 때이기도 합니다.

고려시대의 각종 사서에서 제주 경관에 감귤나무가 등장하는 것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귤의 고장’이라는 제주의 대표적인 호칭은 이러한 고려시대부터 일컬어지기 시작했습니다.

귤의 고장 제주는 고려시대부터 지금까지 그 명맥을 이어오고 있습니다.


2. 조선시대 최고의 진상품 감귤

조선시대에 감귤은 종묘에 제사를 지낼 때 신에게 바치는 제물로, 귀한 손님을 접대할 때,

왕이 신하들에게 특별히 내리는 하사품 등으로 취급되었던 귀한 과실이었습니다.

때문에 조선은 제주의 감귤재배에 각별한 관심을 보였으며,

감귤을 원활하게 공급받기 위해 과원과 상납과실을 관장하기 위한 전담 관서 ‘상림원’을

중앙에 세우기도 하였습니다.

조선시대 매년 겨울, 제주도에서 감귤이 진상되면 그 일부를 성균관 사학 유생들에게 나눠주고,

그들을 대상으로 ‘황감제’라는 과거를 실시하였습니다.

황감제의 ‘황감’은 익어서 빛깔이 누렇게 된 감귤을 의미합니다.

조선시대에는 이렇게 감귤을 통해 성균관 유생의 사기를 진작하고 학문을 권장하기도 하였습니다.


3. 감귤 진상의 부작용

감귤은 진상으로 바쳐지는 공식적인 용도 이외에도

제주 목사를 비롯한 관리들이 중앙에 재력가에게 뇌물로 바치는 등

사적인 용도로 사용하여 폐단이 있었습니다.

이처럼 공식적인 수취 외에 사적 용도로 사용되는 일이 많아지면서

그에 따라 감귤의 진상 액수는 규정보다 많아지게 되었습니다.

즉, 진상 액수 과다로 인한 폐단이 있었습니다.

또한 제주 관아는 더 많은 감귤을 징수하기 위해 감귤나무를 갖고 있는 집들에게

열매가 달리자마자 강제로 지키게 하였습니다.

8월경에는 직접 감귤나무의 열매 개수를 기록해 열매가 떨어지거나 손상이 있어

조금이라도 손실이 나면 감귤나무 주인에게 벌금을 물렸습니다.

또한 기한을 어기면 형벌을 가하기도 했습니다.

이런 감귤 진상의 폐단으로 인해 제주 도민들은 감귤 나무를 잘 심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뽑아버리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결국 감귤 과수원의 발달은 저해시키는 결과를 가져오기도 했습니다.

감귤이 풍작을 이루어도 멀리 떨어진 섬 제주에서 중앙으로의 진상을 위한 운송 또한 어려움이 많았습니다.

제주에서의 운송은 바닷길을 이용해야 하기에 바람의 때를 기다려야 했습니다.

그러다 때를 만나지 못하면 감귤은 썩게 되고 이로 인해 문책을 받기도 하였습니다.

또한 운송 도중 풍랑을 만나 표류하기도 하고, 심지어 목숨을 잃는 경우도 있었습니다.